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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춤추는 나무

언덕에 바람이 불어올 때면 / 주체할 겨를도 없이 하늘로 흩어지는 낙엽 / 그곳엔 나무 한 그루 춤추고 있었다 / 감춘 것들을 드러냈다가도 / 이내 다 덮어 버리기도 하면서 / 돌아오는 길에 지워지지 않는 / 더 잊어야 할 것들은 없는지 / 그렇게 물어보며 집으로 왔다 // 너무 느리거나 서두르면 / 서로에게 부딪칠 수 있다는 말이 있다 / 평면보단 입체로 봐야 더 이해할 수 있듯이 / 같은 곳에 있어도 다르게 보일 수 있듯이 / 밤하늘 가득한 별빛의 머물 곳을 / 이젠 지켜주어야 할 시간이 왔다 // 눈을 감고 바라보고 있어도 / 더 선명하게 그려지는 사람들 사이로 / 말하고 싶지 않았기보다 말할 수 없었던 / 낯선 세상이 아닌, 마음으로 꿈꾸던/ 보지 못한 세상을 느끼고 싶은 건/ 두 손으로 모으며 드린 기도 / 나무의 뿌리 깊은 소원이었다 // 아름다운 세상이 보고 싶어서 / 사막에 날리던 모래바람보다 / 풀들이 춤추고 꽃이 노래하는 / 다른 세상을 매일 맞이하고 싶어서 / 먼 나라의 동화처럼 들릴지라도 / 흥에 겨워 바람에 춤추는 언덕 나무처럼 / 팔을 뻗어 너를 힘껏 안아 주면 되는 것을 / 너를 붙잡고 함께 춤추면 되는 것을     문 하나가 닫히면 문 하나가 열린다. 해가 지면 잠깐의 시간을 두고 다시 해가 뜨고, 별이 지고 나면 하루가 지나고 다시 별이 뜬다. 그는 무릎을 살짝 구부려 나에게 인사를 했다. 나도 쓰고 있던 모자를 허리 아래로 내리며 답례했다. 그렇게 우리는 작은 언덕 구릉에서 만나 친구가 되었다. 나는 언덕을 내려오며 그에게 손을 흔들어 이별을 아쉬워했고, 그는 바람에 잔가지를 흔들며 나에게 다음 약속을 기약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그가 춤추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몇 장 남지 않은 잎사귀를 안은 채로, 좌우로 가지를 움직이고 있었다. 나무가 춤추고 있다니 믿어지지 않았다. 눈 내리던 어느 날에는 눈꽃을 피우며 둥글게 움직이고 있었다. 온종일 피운 눈꽃은 아름답다 못해 눈이 부셨다. 평면으로 내린 눈을 입체로 꽃피우는 나무는 신기하리만큼 깊이가 있었다. 펼쳐 보이기도 하고 담아 내기도 하는 언덕 위 나무는 해마다 키가 자랐고 이제는 내 키를 훨씬 넘어서 그의 끝까지가 하늘에 닿았다.     자세히 보면 세상의 모든 것들은 춤추고 있다. 호수의 파도도 춤추고 있고 하늘에 구름도 춤추고 있다. 꽃이 피어나는 것도, 나뭇잎이 움트는 것도, 비가 내리는 것도 춤추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 들길을 걷다가 갈대가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을 오랫동안 바라본 적이 있다. 신기하게도 세찬 바람에 꺾이지 않는 갈대를 보다 결론지은 것은 ‘갈대는 춤추고 있다’였다. 왜 우리는 춤추지 못하는가? 왜 우리는 반응하지 못하는가? 봄이 온다고 봄이 되는 것은 아니다. 내 안에 봄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무수한 봄이 지나가도 내 안에 봄은 꽃 피지 않을 것이다.     흥에 겨워 바람에 춤추는 언덕 나무처럼, 바람에 눕는 갈대의 춤사위처럼 우리도 춤추면 된다. 나무의 밑동을 껴안고 같이 흔들리면 된다. 너와 나 부둥켜안고 춤추면 된다. 춤추며 밀려오는 파도 앞에서 모래를 휘저으며 덩실덩실 춤추면 된다. 그러면 동화처럼 아름다운 세상이 눈앞에 펼쳐질 것이니까. (시인, 화가)     신호철신호철 풍경 언덕 나무 언덕 구릉 시인 화가

2025-01-27

[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한 그루 단풍나무가 되어

한 그루 단풍나무가 되어     나는 언덕을 오르고 있다 새가 물어주는 열매를 입에 물고 언덕을 오르고 있다 가을에 만났으니 가을만 생각하자던 농담이 아파 가장 가까이 너를 볼 수 있는 언덕을 오르고 있다     나를 반기는 단풍나무 곁에 앉아 붉게 타오르는 단풍나무가 되고 싶었다 움직이지 않아도, 노래하지 않아도 침묵과 부동이 어색하지 않은 나는 한 그루 단풍나무가 되고 싶었다   앙상한 가지, 차갑게 부는 겨울을 부둥켜 안고 마지막 떨어져 버릴 이파리를 모아 기도하는 너의 마르고 긴 손을 부비고 싶었다     맑은 수액, 속으로 속으로 핏줄같이 흐르는 소리 소란한 세상이 싫어, 숨과 숨으로만 살아 나는 보이지 않는 땅 속으로 뿌리 내리는 한 그루 단풍나무가 되고 싶었다     세상이 말하는 힘은 힘이 아니다 뿌리와 뿌리를 이어가는 불거진 핏줄   겨울을 견디어 봄을 당겨 오는 뜨거운 힘 나는 뜨거운 단풍나무가 되고 싶었다   네가 건네준 푸르고 붉은 목도리 두르고 샤갈의 푸른 밤을 날아 한없이 네게 가고 있다 숨과 숨으로만 만날 수 있는 한 밤 중 수 천, 수 만리 깊은 잠 깨워 네게 가고 있다 가파른 언덕 길, 생의 한 모퉁이에서 나는 한 그루 단풍나무가 되어   잠든 당신 창가로 가고 있다       시카고 늦가을은 을씨년스럽다. 몇 일 간 잿빛 하늘이었다. 아마도 전혜린이 살고 있던 독일 뮌헨 루트비히의 날씨가 이러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겨울을 앞둔 늦가을 어김없이 찾아오는 열병. 간간히 안개로 뒤덮인 새벽 언덕은 살아 있는 모든 것을 잠 재우는 묘한 매력이 있다. 언덕을 오르다 보면 멀리 동이 트고 옷 벗은 나무들은 잔 가지를 흔드는데 안개는 가지가지 사이를 매만지며 나무를 사랑한다. 어쩌면 오늘도 그 사랑으로 나무는 제 몸을 견뎌내는지 모르겠다. 고등학교 때 탐닉했던 전혜린의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의 책장을 넘기며 나는 언덕을 오르고 있다. 여기저기 새소리가 들려온다. 반가운 까치가 물어다 준 빨간 열매를 잎에 물고 나는 맑은 수액이 흐르는 나무 숲으로 가고 있다. 쌀쌀해진 언덕은 갈대 부딪치는 소리로 가득하다. 훨훨 타오르다 남겨진 주황색 나뭇잎들은 언덕의 그늘진 틈새를 메우며 쌓여있다. 저 멀리 나를 반기는 단풍나무 한 구루 붉게 타오르는데, 숨과 숨이 만나는 곳, 뿌리와 뿌리로 이어지는 이곳은 우리들만의 세상이었다.   떨어진 단풍 입을 주워 들었다. 아직도 촉촉하게 살아 있었다. 안개는 서서히 거쳐 가고, 제 몸을 드러낸 나무들은 가지와 가지를 부딪치며 서로를 위로하고 있었다. 움직이지 않아도 노래하지 않아도 나는 나무 깊은 뿌리로부터 강한 힘으로 오르는 수액의 흐름을 느낄 수 있다. 죽은 듯 보이지만 결코 죽지 않아, 모든 것을 아래로 아래로 떨구어내 마침내 벌거숭이가 된 나무들. 여전히 봄으로 얽히고 뻗어가는 가지들. 보이는 것으로만 살아왔던 부끄러운 나를 책하며, 보이지 않는 땅속 깊이 뿌리 내리는 나무가 되고 싶다. 부르고 싶은 이름을 목놓아 부르다 붉게 멍든 한 그루 단풍나무가 되고 싶다. 이 언덕 나무 숲은 나의 쿼렌시아. 이곳에 오면 숨과 숨으로 살아가는 나무를 배운다. 나도 숨으로 그들에게 다가 갈 수 있다면, 깊은 호흡으로 나무들을 안을 수 있다면 나무는 깊고 깊은 흐르는 물소리를 내게 들려 주겠지. 독일 뮌헨 전혜린이 살고 있던 그 언덕에도 붉게 단풍이 들었었겠지? 떨어지는 낙엽들을 바라 보며 깊은 숨을 내쉬었겠지? 호흡이 살아있는 동안 그녀의 마음을 빼앗아버린 고통과 사유, 그 날카로운 칼 끝마다 꽃으로 피어 그녀의 몸 구석 구석을 흐르고 있었겠지. 나무 속 세포마다 소리내 흐르는 강물, 결코 고개 숙이지 않는 끈질긴 생명, 너의 깊은 들숨과 날숨. 샤갈의 푸른 밤을 날아 나는 잠든 그대 창가로 날아 가고 있다. (시인, 화가)  신호철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단풍나무 언덕 나무 새벽 언덕 시카고 늦가을

2022-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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